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4년 주사파 파동 (문단 편집) === 파이널, 여의도클럽 발언과 그 이후 === 8월 25일 박홍은 전/현직 방송인들의 모임인 여의도클럽 주최 하의 토론회에서 "주장의 근거가 희박하고 계속해서 했던 말을 번복해 신빙성이 떨어졌는데 증거를 댈 용의는 없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박 총장은 "답답하다. 왜 내가 증거를 대야 하나. 수사는 검사가 할 일이고 찾아서 계도하는 일은 언론의 몫이다. 증거는 북한에 보낸 팩스와 모 월간지를 보면 모두 알 수 있는 사실이다"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발언으로 공안 분위기가 형성되는 등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는데 국민에게 납득할 만한 증거를 댈 순 없는지"란 질문에서도 "답답하다. 이런 일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한다. 언론이 나서서 국민의 경각심을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박 총장은 "주사파가 야당에 750명이나 있다고 했다가 다시 과거에 주사파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말을 번복했다"는 식의 질문에 대해서도 "언론이 나의 말을 왜곡했다. 야당이 아니라 여당까지 포함한 정당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현재 여야 정당과 언론계, 교수 등 750명의 주사파는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다. 간단히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다. 1987~1994년까지 전국 대학의 학생회장만도 550여 명이나 배출됐다. 학생회 간부까지 합치면 15,000여 명의 주사파가 언론과 정당 등 사회 각 계층에 진출해 있다"고 했다. 또 그는 "주사파가 사회를 전복시킬 만큼 큰 위협이 아닌데 국가 차원에서 과민반응하는 거 아닌가"란 질문에도 "에이즈균은 작아도 일단 몸에만 들어가면 인간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위험하다"고 했다며 그 예로 "6개월씩 집을 나간 학생의 부모들이 와서 통사정을 하여 아는 사람들에게 부탁해 아들을 만나게 해 준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면 아들은 '몸은 부모에게서 나왔지만 사상은 내가 알아서 한다. 나의 몸은 이미 김일성 수령의 것'과 같은 식으로 말한다. 주사파에 한번 빠지면 인륜과 도덕이 무시되고 오직 북한 지령과 김일성만 신봉하게 된다. 주사파가 한 줌이라고 무시하면 온 사회에 독버섯같이 퍼질 것이다"라고 했다. 심지어 TV 역시 박홍 총장의 여의도클럽 토론회를 생중계하기도 했는데 동아일보는 해당 토론회의 시청점유율[* 전체 TV 대수 중에서 특정 프로그램 시청으로 따지는 시청률과는 달리 켜져 있는 TV대수 중 특정 프로그램을 시청한 TV 대수를 의미한다.]이 MBC 및 SBS에서 46%로 기록되었다고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8270020913001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4-08-27&officeId=00020&pageNo=30&printNo=22610&publishType=00010|보도했다.]] 그러나 이 통계는 두 방송사의 시청률 24%, 22%를 합친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한겨레신문은 해당 생방송에 대해 당시 시청률이 미디어서비스코리아 조사 기준으로 각각 8.6%, 8.3%라는 저조한 시청률에 그쳤다고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82700289103003&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8-27&officeId=00028&pageNo=3&printNo=1993&publishType=00010|보도했다.]] 반면 조선일보 8월 26일자에선 3면과 5면을 박 총장의 여의도클럽 초청토론회 기조 발언에 할애했다. 3면에선 박 총장의 발언 중 요점 발언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4082600239103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4-08-26&officeId=00023&pageNo=3&printNo=22783&publishType=00010|다뤘고]] 5면에선 모 NL 운동권 출신이 박 총장에게 보낸 편지를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4082600239105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4-08-26&officeId=00023&pageNo=5&printNo=22783&publishType=00010|실었다.]] 주사파 약발이 사그라들기 시작한 8월 27일 조선일보는 사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4082700239103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4-08-27&officeId=00023&pageNo=3&printNo=22784&publishType=00010|<그래도 지구는 둥글다>]]를 통해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사례를 인용하면서 박홍 신부를 옹호하려고 애쓰기까지 했다. 반면 소설가 [[최일남]]은 8월 21일자 동아일보 칼럼 '아침을 열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82100209105003&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4-08-21&officeId=00020&pageNo=5&printNo=22604&publishType=00010|<7백50명이라는 숫자>]]에서 박홍 사태가 몰고 온 '도덕적 훼손감'을 지적했으며,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김종철도 31일자 '아침햇밭'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83100289104010&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8-31&officeId=00028&pageNo=4&printNo=1997&publishType=00010|<'사랑의 사제'와 '공포의 총장'>]]에서 [[박홍 신부]]가 더 이상 '공포의 총장'이 아닌 '사랑의 사제'로 돌아갔으면 하는 심정으로 [[매카시즘]]을 얼른 끝내기를 촉구했다. 그러나 1995년 대학입시에서 [[서강대학교]]는 면접시험에서 학생들에게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를 무시하고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11300289123009&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5-01-13&officeId=00028&pageNo=23&printNo=2121&publishType=00010|"좌경폭력혁명에 가담않겠다."는 서약서 제출을 강요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